향토문화유적소개 조선 선조 연간(16세기 후반)에 홍함(洪函, 1549~1593)이 자신의 아호(雅號)를 따서 건립하였다고 전해지는데, 당대의 명현절사(名賢節士)들과 교유하면서 시문과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삼외’란 군자가 항상 두려워하여야 할 천명(天命), 대인(大人)과 성인(聖人)의 말씀 3가지를 말한다. 지금도 정자에는 백호 임제(白湖 林悌, 1549~1587), 충강공 오봉 김제민(忠剛公 鰲峰 金薺旼, 1527~1599), 충장공 송암 양대박(忠壯公 松巖 梁大樸, 1543~1592) 등 여러 선비들이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풍류를 즐겼다는 내용이 담긴 현판이 걸려 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황희 정승의 할머니 정부인 진주강씨 묘소의 봉분은 타원형으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전형적인 과도기적 묘제이다. 묘역에는 석인상 2기, 묘비 2기, 상석 1기, 문인석 1기 등 총 6기의 석물이 배치되었다. 1564년과 1890년에 세운 묘비는 연꽃잎 모양의 하엽방부형(荷葉方趺形)과 지붕 형태의 옥개방부형(屋蓋方趺形, 지붕 모양의 머릿돌과 사각 받침돌의 비석 형태)으로 조선 전 · 후기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양식이다.
향토문화유적소개 신경준(申景濬)[1712∼1781]의 본관은 고령, 자는 순민(舜民), 호는 여암(旅庵)이다. 1754년(영조 30년)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승정원 좌승지, 순천부사, 제주 목사 등을 지냈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훈민정음 운해(訓民正音 韻解』, 『일본 증운(日本證韻)』, 『언서 음해(諺書音解)』, 『평측운호거(平仄韻互擧)』, 『병선책(兵船策)』, 『수차 도설(水車圖設)』, 『강계지(疆界志)』, 『산수경(山水經)』, 『산경표(山經表)』 등 다양한 분야가 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이 충의비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한응성韓應聖,, 1557~1592 의병장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892년에 세운 것이다. 한응성 의병장은 1557년(조선 명종 11년)에 현재의 임실군 삼계면에서 태어났으며, 순창으로 이사한 후 조헌(趙憲) 선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그는 1592(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재산을 써서 의병을 조직하여 조헌 의병장의 휘하로 들어갔으며, 충청도 금산성에서 왜적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 후 1892(고종 29년) 임금은 한응성에게 이조 참의를 추증(追贈)하고 정려를 내려 주었다. 충의각 앞에 있는 충노부협지비(忠奴夫脅之碑)는 금산성에서 한응성 의병장의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모셔 온 노비 부협의 충심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한응성 의병장의 위패는 충청남도 금산군의 칠백의총(七百義塚)에 모셔져 있으며, 묘는 동계면 구미리에 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조선 성종대에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한 김극뉴(, 1436~1496)는 예학(禮學)을 집대성하여 문묘에 함께 배향된 김장생(金長生, 1548∼1631)과 그의 아들 김집(金集, 1574∼1656)의 5대조이다. 김극뉴 묘를 기준으로 위쪽에 장인인 함양박씨(咸陽朴氏) 박예 부부, 아래쪽에 아들과 증손, 맨 아래에는 사위와 딸의 합장묘인 동래정씨(東來鄭氏) 정광좌(鄭光佐) 묘 등이 차례로 조성되어 있다. 이러한 묘역의 특징 때문에 풍수가들에 의해 일찍부터 조선시대 8대 명당 중 하나인 ‘말명당(馬明堂)’으로 일컬어 졌다. 조선시대 전기의 윤회봉사(輪廻奉祀, 직계 비속의 대가 끊겨 더 이상 친손으로 하여금 제사를 잇게 하지 못할 경우, 딸의 남편이나 자손에게 재산을 상속해 주고 제사를 지내게 한 풍습)와 균분상속(均分相續, 재산 상속시 같은 몫으로 나누어 주는 것)의 형태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서 역사상, 학술상 가치가 있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