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창녕군 향토문화유적 목록 및 정보

2024 창녕군 향토문화유적 목록 및 정보 - 경상남도 리스트
2024 창녕군 향토문화유적 목록 및 정보 - 경상남도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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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녕군 향토문화유적 목록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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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녕군 향토문화유적 목록 통계

문화유적 문화유적수
기념물 11
무형문화유적 2
유형문화유적 26

경상남도 창녕군 향토문화유적 목록 설명

구분별 경상남도 창녕군 향토문화유적 목록 표

기념물 향토문화유적 목록

향토문화유적명 유적종류 소유주체
창녕 사리 지석묘 옛무덤 국유
창녕 대곡 황씨굴 동굴 사유
도천리 공룡 발자국 화석 사유
신라 태자묘 옛무덤 사유
함박산 약수터 약수터 사유
영산 연지 사유
문호장 발자국 화석 사유
창녕 시남 덕벅굴 동굴 사유
창녕 이방 동산굴 동굴 사유
창녕 옥천사지 절터 사유
창녕 화왕산 배바위 자연물 사유

무형문화유적 향토문화유적 목록

향토문화유적명 유적종류 소유주체
영산 문호장굿 민간신앙 사유
구계목도 구전 전통 표현 사유

유형문화유적 향토문화유적 목록

향토문화유적명 유적종류 소유주체
창녕 청련사 승탑 조각 사유
창녕조씨 영적비 및 비각 조각 사유
창녕 오여정 건조물 국유
현감 고유 선정비 조각 사유
이이존 교지첩 고문서 사유
창녕 관음사 금동불상 조각 사유
창녕 관음사 승탑 건조물 사유
창녕 망우정 건조물 사유
절작통편 전적 사유
문호장 목상 조각 사유
문호장 영상 회화 사유
문호장 사당 건조물 사유
영산 현감비군 조각 국유
3.1운동 기념비 조각 사유
창녕 팔락정 건조물 사유
창녕 현감비군 조각 사유
창녕포교당 신중도 회화 국유
양산 통도사 창녕포교당 산신도 회화 국유
양산 통도사 창녕포교당 관음보살, 대세지불상 조각 사유
박관준 홍패 전적 사유
청동여래입상 조각 국유
사령관노비안 고문서 사유
창녕 관룡사 칠성각 건조물 사유
창녕 관룡사 명부전 건조물 사유
창녕 관룡사 법고 공예품 사유
창녕 관룡사 불화 회화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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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녕군 향토문화유적 목록 세부 정보

창녕 청련사 승탑

  • 향토문화유적구분 유형문화유적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7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조각
  • 지정일자 1986-05-30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청련사
  • 규모 5기
  • 조성시대 조선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창녕 청련사는 창녕군 계성면 사리에 있었던 대흥사의 암자로 대흥사의 동쪽에 있다 하여 동암(東庵)이라 불려졌다. 『여지도서(輿地圖書)』 영산현 사찰조의 ’신증(新增)’ 항목에 “대흥사(大興寺), 동암(東庵), 석대암(石臺庵)”을 새로이 기록하고 있어 『여지도서』의 편찬시기가 1757~1765년임을 감안하면 적어도 이 시기 이전에는 동암, 즉 청련암이 창건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헌종 8년(1842)에 기록된 「영산현 영축산대흥사 청련암 법당이건중창기(靈山縣 靈鷲山大興寺 靑蓮庵 法堂移建重創記)」 현판에 의하면, 대흥사는 신라 때 원효스님이 세운 절로 이후 폐사되었다가 인조 6년(1628)에 중창하여 양수암(兩水庵)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대흥사는 이미 폐사되었고, 청련암만이 그 법등을 잇고 있다. 현재 청련사 입구에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첫째 단에는 비석 2기와 최근에 제작된 승탑이 있고, 뒤쪽의 두 번째 단에는 5기의 승탑이 일렬로 놓여 있다. 이를 몸돌형태로 구분하면 원구형(圓球形) 2기와 종형(鐘形) 3기가 있다. 가장 오른쪽(향좌)에 위치한 승탑부터 살펴보면 둥근 받침돌 위에 원구형의 몸돌이 있고, 그 위에 사각형을 이루는 지붕돌이 놓여 있다. 5기의 승탑 중 이 승탑만이 지붕돌을 갖추고 있어 주목된다. 그 옆에는 원형의 받침돌 위에 종형 몸돌만이 있는데 몸돌 윗면은 평평하다. 아마 이 위에 지붕돌이 놓여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가운데에 위치한 승탑은 다른 것과 달리 받침돌은 사각형이다. 이 위에 원구형의 몸돌이있고 몸돌 윗부분인 상륜은 1단의 띠돌림 위에 비교적 높은 연봉형의 보주가 있다. 이 옆에는 원형의 받침돌 위에 종형의 몸돌을 갖춘 승탑이 있는데 몸돌과 한 돌로 이룬 원통형의 상륜은 1단이지만 높이가 높다. 가장 왼쪽(향우)에 위치한 승탑은 높이가 높고, 몸돌이 길쭉한 것만 다르고 전체적인 형태는 그 옆의 승탑과 같다. 현재 청련사 승탑은 일부 지붕돌이 결실되었고, 특히 당호나 문양이 없다. 또한 이와 관련된 기록이 없어 누구의 승탑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몸돌형태가 원구형 또는 종형을 이루며 매우 단순한 점으로 미루어 조성 시기는 조선시대로 추정된다.
  • 전화번호 055-521-2185
  • 관리기관명 청련사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계성면 사리 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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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사리 지석묘

  • 향토문화유적구분 기념물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8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옛무덤
  • 지정일자 1986-05-30
  • 소유주체구분 국유
  • 소유자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규모 1기
  • 조성시대 삼국시대 이전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창녕 사리 지석묘는 창녕군 계성면 사리마을 남동쪽 산기슭에 위치한다. 사리마을 남쪽에 위치하는 구봉산의 능선에 해당하며 수 기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사리 지석묘를 제외하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현재는 전원주택 부지 동쪽에 위치하는 양봉장 사이를 관통하는 등산로의 우측에서 거대한 상석을 확인할 수 있다. 유존하는 상석의 규모는 길이 950cm, 너비 350cm, 높이 330cm 정도로 매우 거대하다. 규모상 창녕군을 대표하는 창녕 지석묘보다 큰 규모로 구릉 정상부에 위치하여 주변 지역을 조망하는 입지적 특징을 갖춘 창녕 지석묘와 동일하게 높은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상징적인 구조물임을 알 수 있다. 하부시설은 지석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양상은 알 수 없다. 지석묘 서쪽 면에는 조선시대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명문이 남아 있다.
  • 전화번호 055-530-1000
  • 관리기관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계성면 사리 산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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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조씨 영적비 및 비각

  • 향토문화유적구분 유형문화유적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36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조각
  • 지정일자 2002-08-28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창녕조씨만호공파조도암종중
  • 규모 1기
  • 조성시대 조선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창녕조씨 영적비 및 비각은 창녕조씨의 시조 조계룡(曺繼龍)의 사적과 영험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와 비각이다. 이건창(李建昌)이 짓고, 후손 조인승(曺寅承)이 썼으며, 제액의 전자는 조두환(曺斗煥)이 썼다. 상단부에 ’창녕조씨시조 신라태사부마도위 창성부원군 영적비(昌寧曺氏始祖 新羅太師駙馬都尉 昌城府院君 靈蹟碑)’라고 전자로 썼으며, 본문은 단정한 해서로 쓰여져 있다. 창녕조씨는 시조 이래 고려시대 8명의 평장사, 9명의 소감을 배출하였으며, 조선왕조 들어와서 덕이 쌓여 서로 이어져 나라의 대성이 되었다고 전제하고, 시조 조계룡의 어머니는 신라 한림학사 광옥(光玉)의 딸로 처녀 때 배가 아파 화왕산의 용지에 기도하였더니 동해용왕의 아들 옥결로 인하여 아들 계룡을 낳았다. 계룡은 진평왕의 사위가 되었으며 동래에서 왜적을 막았다. 고종 29년(1892) 시조의 탄생처인 화왕산 용지에 비석을 세우고자 후손들이 의논하고 이조참판 조인승이 이를 주관하고 이건창에게 비문을 부탁하였다. 동쪽 면(전면)은 이건창의 글을 새겼으며, 서쪽 면(뒷면)에는 후손 병의(柄義)가 쓴 음기와 함께 비의 건립을 주도한 도청(都廳) 전승지 시영(始永)과 군수 유승(有承)의 이름을 새겼으며, 좌측 옆면에 글의 지은이와 글씨, 전액을 쓴 사람의 명단을 새겼다. 우측 옆면은 전액만 새겼고 본문은 새기지 않았다.
  • 전화번호 000-0000-0000
  • 관리기관명 창녕조씨만호공파조도암종중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대암리 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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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대곡 황씨굴

  • 향토문화유적구분 기념물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19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동굴
  • 지정일자 1986-05-30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규모
  • 조성시대 미상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창녕 대곡 황씨굴은 남지읍 고랑산(해발 210m)의 남쪽 사면 해발고도 약 150m에 위치한다. 대곡마을회관에서는 동쪽에 위치한 산사면이다. 황씨굴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곽재우의 아장(亞將) 황사성(黃士誠)이 그 가족을 피신시켰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마을 어르신들에 의하면 그 시기가 일제강점기 또는 한국전쟁 등으로 서로 다르다. 또한 이 굴에서 연기를 피우면 낙동강 건너에서 그 연기가 나온다는 말이 있다. 황씨굴은 대곡마을에서 남지대곡길 167-8(대곡리 산 104번지) 주택을 오른쪽으로 끼고 산을 향해 오르는 길로 가야한다. 초입에 커다란 무덤이 있으며 그 무덤을 오른쪽으로 두고 지나면 또다른 무덤이 있는데, 두 번째 무덤을 지나서 산으로 올라야 한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다니던 산길이 분명했으나 현재는 많이 흐려져서 구분하기가 어렵다. 산길을 따라 전기줄이 설치되어 있는데, 전기줄을 따라 올라가면 돌을 담처럼 쌓아둔 곳이 나온다. 돌이 쌓여진 곳에서 약 20여m 올라가다가오른쪽 사면으로 약 10m 더 가면 암반으로 이루어진 절벽이 있고, 한아름의 참나무가 있는 곳에 황씨굴이 있다. 굴의 입구는 높이가 약 80cm, 폭이 약 80cm로 비교적 작다. 그러나 내부에는 다소 넓은 공간이 있는데, 굴의 입구에서 약 1m 들어가면 굴이 좌우로 나뉘어진다. 오른쪽은 길이가 약 1m로 짧고, 왼쪽은 다소 깊이 들어가는데, 길이가 약 3m이다. 왼쪽 굴의 높이는 약 4m로 성인이 들어가서 설 수 있는 정도이다. 다만 동굴의 폭은 0.7m로 좁다. 따라서 한 가족이 들어가서 피신할 수 있는 공간은 없다. 황씨굴이 위치한 곳은 중생대 백악기 함안층이 분포하는 곳으로, 이곳의 암석은 중간 내지 굵은 모래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중립질 내지 세립질 사암이다. 퇴적암의 줄무늬인 층리는 약하게 발달하고, 덩어리 형태를 보인다. 동굴 내에서는 곱등이가 서식하고 있다.
  • 전화번호 055-530-1000
  • 관리기관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읍 대곡리 산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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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오여정

  • 향토문화유적구분 유형문화유적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34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건조물
  • 지정일자 1997-12-20
  • 소유주체구분 국유
  • 소유자명 양호흥
  • 규모 1동
  • 조성시대 조선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창녕 오여정은 창녕군 남지읍 시남리에서 낙동강 건너의 의령군 낙서면과 통하는 옛 이이목나루터의 서편 절벽에 세워진 재실이다. 어촌漁村 양훤楊 (1597~1650)은 조선 중기의 문신 문간공文簡公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의 제자이었으며, 광해군 때 스승이 귀향을 가자 이곳 오항烏項으로 낙향하여 오여정을 짓고 유학자들과 교류하였다. 오여정이라는 이름은 『논어論語』의 글귀에서 유래되었다. 『논어』선진(先進)의 25장에 이르러서 공자는 자로, 증석, 염유, 공서화 4명의 제자들에게 각자 세상에 나아가서 본인들이 펼치고자 하는 포부에 대해 묻는다. 이 중 가장 늦게 대답한 증석은 ’봄이 오면 입던 옷을 봄옷으로 바꿔 입고 어른 5~6명, 그리고 아이 6~7명과 함께 기(沂)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쐰 다음 노래 부르며 돌아오고 싶습니다’라는 대답을 하였다. 증석의 이야기에 답변으로서 공자는 ’오여점야(吾與點也)’라고 맞장구친다. 오여정은 어지러운 세상의 시시비비에 관여치 않고 사대부로서 학문에 정진하며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지키고자 한 양훤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 당호로 생각된다. 오여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집의 정자이다. 오여정은 창방과 처마도리 받침과 장혀 사이에 소로를 끼운 소로수장집으로 격식을 갖춘 건물로 보인다. 정면 4칸 중 좌측면의 1칸은 다른 칸의 바닥에 비해 한 단 정도 올려 누마루를 구성하였고, 나머지 3칸은 전퇴를 두고 방을 구성하였다. 누마루에는 우물마루를 두고 평난간을 둘렀으며, 방에서 한 짝의창살문이 누마루로 내어져 있다. 우측의 협칸에서 측면 2칸에 쪽마루를 두었다.
  • 전화번호 000-0000-0000
  • 관리기관명 양용준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읍 시남리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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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감 고유 선정비

  • 향토문화유적구분 유형문화유적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35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조각
  • 지정일자 1997-12-20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규모 1기
  • 조성시대 조선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현감 고유 선정비는 영조 30년(1762) 남곡면민이 세운 창녕현감 고유(高裕, 1722~1779)의 선정비이다. 앞면에 ’현감고후유청덕애민선정비(縣監高侯裕 淸德愛民善政碑)’라고 큰 글씨로 적었고, 그의 공적을 4구 16자로 적었으나 제일 첫 번째 글 4자는 파손되어 보이지 않는다. 뒤 2구에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모두 없애었으니 백성들이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린다’고 하였다. 고유의 호는 추담(秋潭), 본관은 개성이다. 영조 19년(1743) 문과에 급제하고 병조좌랑·창녕현감·경상도사·필선·장령을 지냈으며 정조 원년(1777) 승지에 올랐으며 정조 20년(1796) 청백리에 추천되었다. 고유는 영조 33년(1757) 특지로 창녕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창녕은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생계를 잇기 힘들었으므로 고유가 폐단을 혁파하고 인애와 엄정함으로 고을을 다스리니 수개월만에 고을이 소생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경상감사 조엄이 밀양에 조창을 창설하여 조세를 납부하게 하여 폐단이 막심하여 고유가 문서를 보내어 폐단을 없애고자 하였지만 조엄이 듣지 않자 조정에 아뢰어 폐단을 없애었다. 또한 남붕(南鵬)이라는 승려가 권세를 믿고 불법을 행하였지만 누구도 다스리지 못하고 오히려 파직되었지만 고유가 이를 바로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초계의 여인 염씨가 고을 사람에게 추악한 무고를 당하여 자살하였더니 감사가 단순한 자살로 처리하고자 하니 고유가 이를 밝혀 올바로 처리하게 하였다고 한다. 고유가 창녕현감으로 있으면서 올바른 정사를 행하고 임기가 차 상주 집으로 돌아갈 때 백성들이 듣고 밀양까지 따라와 울며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그는 야밤에 출발하여 돌아갔으니 창녕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웠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고유의 선정비가 바로 이것으로 보인다. 고유의 선정비 옆에는 현감 홍종화의 선정비도 세워져 있다. 홍종화의 선정비는 헌종 15년(1849)의 것이다.
  • 전화번호 055-530-1000
  • 관리기관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읍 칠현리 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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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존 교지첩

  • 향토문화유적구분 유형문화유적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38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고문서
  • 지정일자 2005-12-29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이병일
  • 규모 1첩
  • 조성시대 조선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이이존 교지첩은 조선 인조 연간에 이이존李以存(1609~미상)에게 내린 교지 등을 모아 첩帖으로 만든 것이다. 이이존을 조산대부(朝散大夫) 행 홍문관부수찬 지제교(行弘文館副修撰知製敎)에 제수하는 교지를 비롯하여, 숭덕(崇德) 7년(인조 20년, 1642) 7월 13일에 역마를 타고 속히 올라오라는 내용의 유지(有旨) 등이 있다. 유지의 내용은 “이제 경을 홍문관 부수찬에 제수한다. 경연(經筵)에 입번(入番)하는 일은 긴요하니 경은 역마를 타고 속히 올라오라.”는 것이다. 유지는 승정원의 담당 승지承旨가 왕명을 받아 그 내용을 직접 작성하여 명령을 받는 이에게 전달하는 왕의 명령서를 이른다. 조산대부는 조선시대 종4품의 종친(宗親) 문관(文官) 벼슬이다. 숭덕은 중국 청나라 태종(太宗)의 연호로 1636년부터 1643년까지 사용되었다. 태종의 재위 기간인 1636년부터 1643년까지의 문서는 많이 발견되지 않는다. 숭덕을 쓰기도 하였지만 연호 없이 간지만을 쓰거나 명나라 의종(毅宗)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쓰고 있는 경우도 발견된다. 이는 당시 조선의 대외적인 정치혼란에 따른 것으로, 조선이 1636년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청나라 개국 초에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의 요구에 따라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였지만 대내적으로는 문서에 간지를 기재하거나 명나라 숭정의 연호를 사용하는 식으로 그 반감을 드러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이존의 자(字)는 존오(存吾), 본관은 여주(驪州)이다. 인조 8년(1630)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인조 17년(1639)에 문과 별시(別試) 갑과(甲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이조 정랑(吏曹 正郞), 홍문관 응교(弘文館 應敎), 진주 목사(晉州 牧使) 등을 지냈다. 정확한 사망 연도는 알 수 없으나 효종 1년(1650) 4월 23일 서용敍用하라는 기사가 보이고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지은 이이존의 만사(輓詞)가 『청음집(淸陰集)』에 수록된 것으로 보아 1650년에서 1652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전화번호 000-0000-0000
  • 관리기관명 이병일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구미2길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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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리 공룡 발자국

  • 향토문화유적구분 기념물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15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화석
  • 지정일자 1986-05-30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규모
  • 조성시대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도천리 공룡 발자국은 2003년 남지-영산 간 5번 국도 확장 공사 중 발견되었다. 국도 확장 공사 중 도천리 도로변 암반 제거 부분에서 다수의 공룡 발자국(보행렬)이 발견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 전남대학교 한국공룡연구센터와 부산지방국토관리청에서는 2003년 8월 27부터 2004년 6월 26일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창녕군 도천리 지역은 중생대 백악기 후기인 약 9천만 년 전에는 얕은 호수 내지는 호수 가장자리였다. 9천만 년 전 호수였을 때는 진흙과 고운 모래들이 있었고, 바람이 불어 호수의 물이 일렁이면 진흙과 고운 모래가 일렁이는 물결과 똑같은 모양으로 물결자국을 만들었다. 비가 오랫동안 내리지 않을 때에는 호수가 마르면서 진흙이 거북이 등껍데기처럼 갈지면서 건열이 자주 만들어졌다. 건열이 만들어질 때, 목 긴 초식 공룡들이 걸어가면서 발자국을 남겼고, 그대로 건조된 후에 또 다른 모래와 진흙으로 덮여서 단단한 암석이 되었다. 중생대 백악기는 공룡들이 가장 다양했고 많이 살았다. 이곳에서는 백악기 공룡들 중에서 네 발로 걷는 목 긴 초식 공룡들 10마리가 나란히 걸어가면서 보행렬을 남겼다. 이 중에서 가장 길게 관찰할 수 있는 보행렬은 최대 40m이다. 목 긴 초식공룡 10마리가 나란하게 걸어갔다는 것은 초식 공룡들이 무리를 지어 다녔다는 것을 보여준다. 발자국은 모두 455개 이상이 발견되었고, 발자국의 길이는 앞발자국이 평균 21.52cm, 뒷발자국은 평균 34.53cm이다. 발자국의 길이를 근거로, 도천리의 목 긴 초식 공룡은 엉덩이까지 높이가 평균 1.4m로 추정된다. 따라서 도천리의 목 긴 초식 공룡은 비교적 작은 공룡임을 알 수 있다. 작은 목 긴 공룡 10마리는 사람이 걷는 속도보다 느린 시속 약 2.5㎞/h의 속도로 함께 걸어가면서 도천리지역의 호수를 지나갔다.
  • 전화번호 055-530-1000
  • 관리기관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도천면 도천리 136-2
  • 네이버맵 네이버맵 링크
  • 카카오맵 카카오맵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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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관음사 금동불상

  • 향토문화유적구분 유형문화유적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11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조각
  • 지정일자 1986-05-30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관음사
  • 규모 1점
  • 조성시대 조선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창녕 관음사 금동불상은 육계 위에 정상계주가 있고, 5개의 잎사귀 모양의 오엽관을 쓰고 있는 여래좌상이다. 두 눈은 길게 찢어져 위로 치켜 올라갔고, 코는 높다. 대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이며, 가슴에는 수평으로 가로지른 내의를 입었다. 손 모습은 오른손을 내려 땅을 향하고 왼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가운데에 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다. 대좌는 3단으로 하단부는 사각형이며, 중간에 앙련을 놓은 다음 앙련과 복련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연화대좌를 상단에 배치한 특이한 구조이다. 연꽃잎은 앞면에만 조각하여 정면성을 강조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보관을 쓰고, 편단우견의 대의, 손 모습이 항마촉지인을 결한 상은 634년 현장법사가 인도 보드가야의 마하보리사에서 친견한 보리서상(菩提瑞像)과 유사한 형식이다. 대칭을 이루는 대좌형식은 고려 말에서 조선 전기에 유행하던 형식이며, 오엽관은 근대기 불화에 등장하는 특징으로 여러가지 요소들이 조합된 독특한 불상이다. 제작 시기는 20세기 이후의 작품으로 판단되며 정확한 시기 추정에 대해서는 조금 더 연구가 필요하다.
  • 전화번호 055-521-1874
  • 관리기관명 관음사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도천면 영산도천로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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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관음사 승탑

  • 향토문화유적구분 유형문화유적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12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건조물
  • 지정일자 1986-05-30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망우정 외 7명
  • 규모 1기
  • 조성시대 조선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창녕 관음사는 일제강점기 때 창건되었으며 ’관음당’이라고도 하였는데 한국전쟁 때 절은 모두 전소하였다. 이후 새로이 불사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창녕 관음사 승탑은 현재 요사채 오른쪽 담장 밑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체 높이 125cm이다. 원형의 2겹으로 된 받침돌 위에 올라앉은 몸돌은 원구형이며, 지붕돌은 사각형으로 맨 꼭대기에 연봉형의 상륜이 올려져 있다. 받침돌은 마치 연화대좌의 앙련과 복련이 겹쳐 있는 듯이 2겹으로 되어 있으며, 몸돌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사각형의 지붕돌은 탑의 지붕돌처럼 아래에 3단의 받침이 있으며, 지붕돌 윗면에는 4각의 각 모서리와 중앙을 이어주는 양각의 돌기선이 있다. 『창녕군지』에는 이 지붕돌이 경내에 있는 창녕 도천 삼층석탑의 지붕돌이라 하였지만 명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승탑의 지붕돌에 3단 받침이 있는 점은 다른 어느 승탑과는 다른 특이한 점이라 할 수 있다. 승탑의 제작 시기는 원구형의 몸돌형태로 미루어 조선시대로 추정된다.
  • 전화번호 055-530-1000
  • 관리기관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도천면 영산도천로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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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망우정

  • 향토문화유적구분 유형문화유적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14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건조물
  • 지정일자 1986-05-30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망우정 외 7명
  • 규모 1동
  • 조성시대 조선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창녕 망우정은 굽이치는 낙동강과 강변 모래사장이 내려다보이는 야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3칸짜리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1552~1617)가 생전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망우정은 ’근심을 잊고 살겠다 ’는 뜻을 지닌 이름으로, 망우당이라는 곽재우의 호도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한다. 곽재우는 관직에 미련을 두지 않았는데 이는 이순신 장군의 투옥과 절친했던 의병장 김덕령의 무고한 옥사 때문이었다고 한다. 곽재우는 선조 33년(1600) 봄에 병을 이유로 삼아 경상좌도병마절도사직을 사직한 후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2년 동안 전라도 영암으로 유배되었고, 그 후 현풍 비슬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다가 선조 35년(1602) 영산현 남쪽 창암진(蒼巖津, 지금의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강가에 망우정을 짓고 기거하였다. 선조 37년(1604)과 광해군 2년(1610) 조정의 부름을 거절하지 못하고 잠시 관직에 나간 적이 있으나 삼도수군 통제사·한성부 우윤·한성부 좌윤·전라도 병마절도사 등의 관직을 수차례 거절하였다. 곽재우는 나룻배를 띄워 낚시를 하고, 거문고와 차를 가까이 하며 망우정에서 만년을 보냈다고 알려진다. 곽재우는 죽기 전에 외손자 이도순(李道純, 1585~1625)에게 망우정을 물려주었는데, 그 후로 명칭이 여현정(餘賢亭)으로 바뀌었다. 여현정은 조선 중기의 학자 간송당(澗松堂) 조임도(趙任道, 1585~1664)가 이도순에게 제안한 명칭으로, ’곽재우가 어진 이에게 물려준 정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한 사연은 건물 내부에 걸려 있는 ’여현정기(餘賢亭記)’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망우정 뒤쪽으로는 정조 13년(1789)에 고을 유림들이 세운 창녕 망우당 곽재우 유허비와 근래에 세운 충익공 망우당 곽선생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망우정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72년 벽진이씨(碧珍李氏) 후손들이 중수하였고, 1979년 창녕군에서 전면 보수하였다.
  • 전화번호 055-530-1000
  • 관리기관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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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작통편

  • 향토문화유적구분 유형문화유적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16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전적
  • 지정일자 1986-05-30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공영한
  • 규모 77종
  • 조성시대 조선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절작통편』은 송시열(宋時烈, 1606~1689)이 주희의 저술을 정리하고 연구하기 위하여 편찬한 것으로 손자 송인석(宋麟錫, 1650~1692)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것이다. 36권 25책으로 이루어 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절작통편』은 36권 20책 본으로 책의 수에서는 차이가 있으나 숙종 12년(1686) 숙종의 명에 의해 교서관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한 동일본이다. 현재 이 판본에서는 『절작통편 보유』는 빠져있고, 『절작통편』 36권만 완질로 존재한다. 권1에서 권20까지는 『주자서절요』를, 권21에서 권36까지는 『주문작해』를 수록하였다. 이 책에는 소장자의 주기註記가 책 상단 부분에 있어 『절작통편』에 대해 소장자의 깊은 연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전화번호 000-0000-0000
  • 관리기관명 공영한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부곡면 부곡리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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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 문호장굿

  • 향토문화유적구분 무형문화유적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4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민간신앙
  • 지정일자 1986-05-30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규모
  • 조성시대 조선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영산 문호장굿은 보통 호장굿이라고도 하며 일반적인 굿과 달리 단오 명절에 벌이는 영산 고을의 축제이다. 이 굿은 근대 이후 몇 번의 변화를 겪었다. 전통적 행정제도의 해체로 문호장굿을 주도한 아전이 행정 일선에서 물러남에 따라, 굿의 조직적, 경제적 기반 약화는 불가피했다. 이렇듯 근간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일제의 강점은 굿의 전승에 또 다른 영향을 미쳐,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공동체적 전승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못하고, 문호장신文戶長神에 대한 믿음이 강한 일부 주민들에 의해 개별적인 전승만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해방은 문호장굿의 전승에 활력을 불어넣어 잠시 과거의 문호장굿을 재현할 수 있었지만,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인해 다시 공동체적 전승이 중단되고 일제강점기 말처럼 개별적 전승만 이루어지게 되었다. 문호장굿의 공동체적 전승이 재개된 것은 1963년 제2회 3·1민속문화제에 이르러서였다. 문호장굿의 유래에 대해 이명구(李明九)에 의해 헌종 14년(1848) 간행된 『연조귀감속편(曺龜鑑續編)』, 관감록(觀感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문예희(文禮凞)는 영산의 향리로서 임진왜란 때 군공을 세워 특별히 향역을 면제받았다. 아들인 호장 문득화文得化는 재주와 도량이 남달랐다. 천문과 둔갑도 모두 분명하게 터득했다. 집이 읍의 남쪽 유민산留民山 아래 있었는데, 밤에는 꼭 호랑이를 타고 다녔다. 실수로 어사에게 발각되어 거듭 추궁을 당하였다. 문득화는 탄식하면서 “아무 죄도 없는데 벌을 받느니 차라리 피하여 벌을 면하는 것이 낫겠다.”고 하면서 수노를 데리고 영축산으로 들어가 환신(幻身)하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수리의 꿈에 나타나 산 위에 사당을 세우고 5월 5일(단오)에 경건하게 재계하여 제사를 치르며 제수는 관에서 되데, 제사를 치르는데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화를 입을 것이라고 했다. 순조 14년(1814)에 현감인 정경우(鄭耕愚)가 요사스럽고 허황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금지시켰다. 그러자 한 달 내에 관아의 11인이 죽으므로 두려운 나머지 처음같이 제사를 지냈다.
  • 전화번호 055-530-1000
  • 관리기관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교리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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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장 목상

  • 향토문화유적구분 유형문화유적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2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조각
  • 지정일자 1986-05-30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문호장사당
  • 규모 1기
  • 조성시대 조선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문호장 목상은 영축산 영명사에 모셔진 문호장의 목상이다. 문호장 사당 인근의 나무를 베니 피가 나오고 사람 형상이 보인다고 하여 영명사에 모셔진 것이다. 자연목으로 약간의 얼굴 모상으로 유추할 수 있는 형상이다. 현재 사람처럼 한복을 입히고 좌정한 자세로 사당에 봉안되어 있다. 주민들의 구전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탐을 내어 가져갔으나 집안에 우환이 그치질 않아 다시 영산으로 반환한 것이라 한다.
  • 전화번호 000-0000-0000
  • 관리기관명 문호장사당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교리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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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장 영상

  • 향토문화유적구분 유형문화유적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3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회화
  • 지정일자 1986-05-30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문호장사당
  • 규모 1폭
  • 조성시대 조선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문호장 영상은 호랑이를 타고 태극선의 접부채를 쥐고 갓과 도포 차림을 한 문호장의 모습을 비단 바탕에 담채로 묘사한 그림이다. 호장은 고려 초기 당대등이 바뀐 것으로 고려 말기까지 존속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이방, 호방, 변방으로 삼공형(三公兄)으로 불리었다. 문호장 설화는 조선시대의 설화로 내려오고 있으나 호장이 고려향직임을 감안할 때 고려조의 전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문호장의 사당은 창녕군 영산면 내에 4곳에 위치하는데 한 곳인 삼시랑 사당에서 부인의 위패를 정부인(貞夫人)으로써, 외명부 2품의 관직으로 되어 있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는 부합되지 않는다. 문호장 사당은 영산이 고려 말 사노비의 아들인 신돈의 발흥과 멸망으로 폐해를 입어 이와 관련된 억울한 죽음을 당한 문호장의 향사를 받드는 곳이다. 현재 영축산 영명사 소장 문호장 영상은 최근세에 영산극장의 간판을 그리던 사람이 처음 합판에 유성안료를 사용하여 그려 다른 사당에 모신 작품들을 모본으로 하여 영명사에서 한국화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현재 영명사에는 문호장 설화와 관련하여 총 3점의 회화작품이 전한다. 문호장 영상 외에 다른 작품은 호랑이를 타고 오른손에 파초선을 들고 앉은 자세의 산신탱이며, 그 옆으로 한복을 차려 입고 좌정한 문호장의 부인과 후처 및 딸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 배치되어 있다.
  • 전화번호 000-0000-0000
  • 관리기관명 문호장사당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교리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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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장 사당

  • 향토문화유적구분 유형문화유적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1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건조물
  • 지정일자 1986-05-30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문호장사당
  • 규모 1동
  • 조성시대 조선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문호장굿은 영축산 중턱에 지어진 문호장 사당에서 거행되었는데, 지금의 건물은 옛 사당을 헐고 근래에 다시 지은 것으로 홑처마에 팔작지붕을 얹은 세 칸짜리 구조이다. 현판에는 문성황각(文城隍閣)이라 새겨져 있다. 원래는 문호장과 처첩, 딸 등이 각각의 사당을 하나씩 가지고 있어 총 네 개의 사당이 영축산 중턱에 있었다고 한다. 현재 문호장 사당은 영산사적보존회를 중심으로 하여 영명사 내에 1개소, 영산시장 내 1개소, 성내리와 죽사리 일대에 2개소 등 총 4개소가 관리되고 있다. 중심이 되는 사당은 영명사 내에 위치하고 있다. 사당 내부 중앙에는 호랑이의 등에 올라탄 문호장을 그린 회화와 ’호장문선생신위(戶長文先生神位)’라 적힌 위패가 모셔져 있다. 왼쪽에는 문호장의 두 부인과 딸이 그려진 그림이 있고 오른쪽에는 산신탱화가 모셔져 있다. 문호장 그림과 오른쪽 산신 탱화 사이에 자연적 형상의 목상木像 하나가 모셔져 있는데, 이는 문호장 사당 뒤에 서 있던 나무를 베었을 때 그 안에서 나온 것이라 하며 ’문호장상’이라 믿고 있다.
  • 전화번호 000-0000-0000
  • 관리기관명 문호장사당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교리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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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이버 문호장 사당 검색 링크

신라 태자묘

  • 향토문화유적구분 기념물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13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옛무덤
  • 지정일자 1986-05-30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규모
  • 조성시대 삼국(신라)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신라 태자묘는 영산읍성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태자의 묘가 있던 곳이라 전해진다. 묘역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인 1917년 이마니시 류(今西龍)에 의해 고적조사가 이루어졌다.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 당시 봉토는 유실되었고 현실(玄室)의 일부만 남아 있었다. 잔존하는 현실 규모는 높이 130cm, 하단 폭 160cm, 상단 폭 84cm 정도이며 개석 4매와 거석(巨石)을 이중으로 세운 흔적이 잔존한다고 전한다. 태자묘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여지도서(輿地圖書)』 영산현조 및『영산현읍지(靈山郡邑誌)』 등에 “태자산(太子山)은 현의 북쪽 1리에 있으며, 신라 태자묘가 있었다는 것에서 연유한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보아 태자묘가 있었던 사실은 파악해 볼 수 있으나, 상세한 기록이 없어 연유나 현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현재 묘역은 터만 남아있으며, 뒤편으로 태자각이 복원되어 있다. 태자각 내부에는 ’신라태자(新羅太子)’ 위패와 ’주상산령지위(主上山靈之位)’, ’성황당제단(城皇堂祭壇)’ 비문이 적힌 비석이 2기 세워져있다.
  • 전화번호 055-530-1000
  • 관리기관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교리 497
  • 네이버맵 네이버맵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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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이버 신라 태자묘 검색 링크

함박산 약수터

  • 향토문화유적구분 기념물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22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약수터
  • 지정일자 1986-05-30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규모
  • 조성시대 미상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함박산 약수터는 창녕 영산 만년교를 지나 영산천이 흐르는 도로를 따라가다 창녕 영산 석빙고 가기 전 좌측편에 약수사라는 이정표로 진입하여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면 약수사라는 사찰이 나오며, 그 옆에 위치하고 있다. 이 약수터는 정확한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신라 경덕왕 때 발견되었다고 전해지며, 전국의 약수터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약수터로 유명하다. 특히 한국관광공사가 조사한 결과 전국 청정약수터 7선 중 함박산 약수터가 첫 번째로 선정되었다. 약수터의 지질적인 특성은 기반암이 작약산 안산반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요광물은 사장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약수는 지표로부터 깊지 않고 암석이 균열된 사이를 통해 흘러내리게 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약수터의 유래에는 설화가 이어져 내려오는데 신라 경덕왕 때 노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나무꾼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때부터 이 지역의 사람들은 이곳 함박산 약수를 이용하게 되었으며 많은 환자가 병을 고쳤다고 한다. 그 소문이 궁중에까지 전해져 당시 불치병에 걸린 왕자가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으나 병을 고치치 못하고 있다가 함박산 약수터 소식을 전해듣고 평민으로 가장하여 이 지역에 머물면서 약수를 매일 마셨더니 왕자의 병이 완쾌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함박산 신령님께 기도를 드리고 밀양 표충사에 가서 부처님께 기도를 드렸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다. 그리고 함박산 약수는 마음이 착하고 효성이 지극한 사람에게는 더욱 효험이 있다고 전해져 오며, 반드시 효성이 지극한 사람만이 효험을 얻는다 전한다. 때로는 산신령이 나타나 불효를 훈계하기도 한다는데, 요즘도 봄이면 함박산을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 전화번호 055-530-1000
  • 관리기관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교리 산 38-2
  • 네이버맵 네이버맵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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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이버 함박산 약수터 검색 링크

구계목도

  • 향토문화유적구분 무형문화유적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6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구전 전통 표현
  • 지정일자 1986-05-30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규모
  • 조성시대 조선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구계리는 영산면 산간에 위치한 마을로서 지금까지 목도소리1)를 전승해오고 있다. 목도질은 통나무나 바위 등 무거운 것들을 운반하는 공동작업이다.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몇 조의 사람들이 서까래 같은 나무에 줄을 매단 뒤 그 위에 통나무 또는 바위를 올려서 운반하는데, 워낙 작업이 힘들고 위험하기 때문에 합심해서 발을 맞추어 앞으로 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이 때문에 목도질을 할 때는 어김없이 목도소리를 하였다. 앞소리꾼이 소리를 매기면 나머지 일꾼들이 소리를 받으며 노동의 고됨을 덜고 작업의 효율성을 높였다. 목도질에는 두 사람이 하는 이목도, 네 사람이 하는 사목도, 여덟 사람이 하는 팔목도 등이 있다. 옮기는 물건의 크기와 무게에 따라 적당한 형태를 취하는데, 구계리에서는 주로 경사가 심한 산에서 벌목한 통나무를 운송수단이 있는 평지까지 운반하기 위해 목도질을 했으며, 경우에 따라 십육목도와 삼십이목도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 전화번호 055-530-1000
  • 관리기관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구계리 520-1
  • 네이버맵 네이버맵 링크
  • 카카오맵 카카오맵 링크
  • 네이버 구계목도 검색 링크

영산 현감비군

  • 향토문화유적구분 유형문화유적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9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조각
  • 지정일자 1986-05-30
  • 소유주체구분 국유
  • 소유자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규모 32기
  • 조성시대 조선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영산 현감비군은 영산현을 관할하는 지방관의 선정비를 모은 것으로 모두 32기이다. 영산은 삼국시대 서화현(西火縣)이었다. 고려시대 영산현(靈山縣)으로 고쳤고, 고려 원종 때 처음 지방관으로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조선시대 들어와 감무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가 고종 33년(1896) 군으로 승격되었다. 1914년 창녕군과 합쳤다. 대부분 현감의 선정비로 『교남지』에 선정비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하지 않은 인물은 유명재(柳命才), 이정재(李鼎宰) 두 명이다. 암행어사로 선정비를 세운 유석은 고종 8년(1871) 문과에 급제한 인물로 이 비석이 세워진 연대는 고종 24년(1887)이다. 유석은 고종 23년(1886)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활동하면서 창녕, 밀양 등지의 세곡 운반비용 중 징수되지 못한 것을 탕감해주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따라 이듬해 선정비가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좌수 신침의 경우 ’무휼군민(撫恤軍民)’이라고 공적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군정과 관련되어 송덕비를 세운 것이다. 수령들의 선정비에 비해 크기가 작다.
  • 전화번호 055-530-1000
  • 관리기관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동리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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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기념비

  • 향토문화유적구분 유형문화유적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17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조각
  • 지정일자 1986-05-30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규모 2기
  • 조성시대 현대(1956년)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3·1운동 기념비는 창녕지역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비이다. 1919년 전국적으로 3·1 운동이 일어나자 영산에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애국지사 23인이 1919년 3월 13일부터 영산면 일대와 창녕읍에 이르기까지 전 창녕군에서 맨주먹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비는 기념비와 옆의 삼일독립선언서탑(三一獨立宣言書塔) 2기로 이루어져 있다. 1956년 세워진 3·1운동기념비는 23인의 결사대의 서약서를 뒷면에 수록하고 23인의 명단을 기록하였다. 23인은 구중회, 김추은, 장진수, 하은호, 박도문, 임창수, 박중훈, 이기석, 장정수, 김두영, 구남회, 하영규, 남용희, 이수철, 구판진, 구판돈, 서점수, 김찬선, 신암우, 김금영, 최봉용, 권재수, 조삼준이다. 비 옆에 삼일독립선언서탑에는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새겼다. 3·1운동 기념비는 1956년 3월 11일 연지 옆의 로터리에 건립하였다가 1980년 현 위치로 옮겼다.
  • 전화번호 055-530-1000
  • 관리기관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동리 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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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이버 3.1운동 기념비 검색 링크

영산 연지

  • 향토문화유적구분 기념물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21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 지정일자 1986-05-30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규모
  • 조성시대 조선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영산 연지는 창녕군 영산면 서리의 영산면사무소 서쪽에 위치한 못이다. 못 가운데 5개의 섬이 있고 그 중 북쪽에 항미정(杭眉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과거 영산에 화재가 잦아 풍수지리설에 의거해 영산의 진산인 영축산의 산세(불기운)를 막기 위해 조성했다고 전한다. 영축산의 정기를 받는 좌청룡인 남산이 낙동강 쪽으로 흐르도록 못을 파고, 못 속에는 용의 알을 형상화한 섬을 조성하여 청룡의 머리를 돌리게 하는 지세를 만들었다고 한다. 영산 연지의 조성 시기는 항미정 기문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현감(縣監) 신관조(申觀朝)가 고을에 부임한 이후 연지를 살펴보니 60여 년 동안 가꾸지 않아 못의 구실을 못한다 하여 만년교(萬年橋)를 중건(고종 29년, 1892)하기 3년 전에 수리한 것으로 전한다. 따라서 현감 신관조가 연지를 수리한 것은 만년교 중건시기보다 3년 전인 고종 26년(1889)으로 보이며, 연지가 처음 조성된 것은 60여년 전인 1830년대 이전으로 볼 수 있다. 현재의 연지는 고종 26년(1889) 수리 시에 확장된 크기로 처음에는 이보다 작은 규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못을 다시 파고 개울물을 끌어들여 연지를 수리하였으며, 하늘의 오성을 본따 다섯 개의 섬을 만들고 연못 둘레에는 불막이로 버드나무를 심어 잦은 화재를 막았다. 3년 뒤인 고종 29년(1892) 연지의 가운데 큰 섬에 한 칸의 초가 정자를 세우고 중국의 유명한 항주호수의 미정(眉亭)에 비하여 현판을 항미정(杭眉亭)이라 하였다. 항미정은 이후 1920년대 2칸의 기와 정자로 개축하였다가 1971년 다시 육각 정자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1982년 5월 30일 호국공원 조성시에 영산 연지의 섬 4개와 주변을 정화했다.
  • 전화번호 055-530-1000
  • 관리기관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서리 1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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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이버 영산 연지 검색 링크

문호장 발자국

  • 향토문화유적구분 기념물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10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화석
  • 지정일자 1986-05-30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죽사마을회
  • 규모 일원
  • 조성시대 선사시대(미상)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문호장 발자국은 창녕 영산고분군에서 남서쪽으로 약 350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영산면 동리에서 논리보건진료소를 잇는 도로변에 위치한다. 도로변에 약 22㎡ 면적을 둘러싸고 있는 작은 한옥 담장이 있고, 조그마한 출입문이 있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북서쪽으로 경사진 퇴적암반의 표면에 작게 움푹 패인 자국들이 줄지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움푹 패인 자국들은 보다 작은 것과 조금 더 큰 것들이 짝을 이루고 있는데, 마치 사람이 구두를 신었을 때, 뒤꿈치와 앞발바닥 부분과 비슷하게 생겼다. 이것이 경사진 암석 표면을 오르는 모습으로 찍혀 있다. 이 자국을 문호장 발자국이라고 한다. 문호장 발자국은 약 400여 년 전 내지 350여 년 전에 영산지역에 살았던 문씨 성을 가진 사람의 발자국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름은 모르고 문씨 성을 가진 이 사람은 과거 관아의 ’호장’직위를 가졌던 사람이기 때문에 ’문호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문호장은 호랑이를 타고 다니고, 축지법을 쓰며, 도술에 능한 자로써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고 전해져 온다. 문호장은 영험한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단단한 바위에 발자국을 남길 수 있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호장의 발자국이라고 하는 이 발자국은 중생대 백악기 약 9천만 년 전 호수 주변에 살았던 소형 목 긴 초식 공룡인 용각류의 발자국이다. 사람의 뒤꿈치에 해당하는 것은 목 긴 초식 공룡의 앞발자국이고, 앞발바닥에 해당하는 것은 뒷발자국이다. 결국 소형 목 긴 초식 공룡이 경사진 방향으로 걸어가는 보행렬인 것이다. 앞발자국 6개, 뒷발자국 7개로 구성된 하나의 보행렬이며, 뒷발자국의 길이는 평균 약 2cm, 앞발자국의 길이는 약 20cm이다. 뒷발자국은 뒷꿈치쪽이 좁아지는 타원형이며, 앞발자국은 원형 내지 반원형이다.
  • 전화번호 000-0000-0000
  • 관리기관명 죽사마을회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죽사리 1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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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이버 문호장 발자국 검색 링크

창녕 팔락정

  • 향토문화유적구분 유형문화유적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37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건조물
  • 지정일자 2005-12-29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팔락정
  • 규모 1동
  • 조성시대 조선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창녕 팔락정은 창녕군 유어면 미구리에 위치한 누정으로 창녕현감으로 부임한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가 창건한 정자이다. 정구는 창녕현감으로 부임하여 창녕현민의 교화와 인재양성에 노력한 공이 큰 유학자이다. 선조 13년(1580)에 팔락정을 창설하여 직접 학문을 가르치고 장려하였으며, 팔락정 창설 이후 현내에 팔재(八齋)라고 불리는 서당을 추가로 창설하여 창녕현의 학풍을 진흥하였다. 그 뒤 오랜 세월에 허물어진 것을 철종 3년(1852) 유지들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팔락정이라는 이름은 정자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8경으로 선정하여 그 풍경을 즐긴다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팔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맹호도강(猛虎渡江)-정자 앞의 낙동강 건너 지형이 범이 건너오는 듯한 형세를 보는 즐거움, ② 원포귀범(遠浦歸帆)-강 멀리서 범선이 포구로 들어오는 것을 보는 즐거움, ③ 평사낙안(平沙落雁)-넓은 강모래사장에 기러기가 앉는 것을 보는 즐거움, ④ 북지홍련(北池紅蓮)-정자 북쪽의 팔락 호수에 피어 있는 홍련을 보는 즐거움, ⑤ 역수십리(逆水十里)-정자 앞개울의 물이 강의 흐름과 반대로 십리를 흐르는 것을 보는 즐거움, ⑥ 전정괴수(前庭槐樹)-앞뜰의 회화나무를 보는 즐거움, ⑦ 후원오죽(後園烏竹)-정자의 후원에 있는 오죽을 보는 즐거움, ⑧ 서교황맥(西郊黃麥)-정자 앞 서쪽들에 보리가 누렇게 익은 풍경을 보는 즐거움을 뜻한다.출입문을 통해 진입하면 마당이 마련되어 있고 정면에 팔락정이 위치하고 있다. 단층 팔작지붕의 목조와가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구조로, 홑처마 팔작지붕을 올렸다. 시멘트로 정비한 기단의 테두리에는 자연석을 방형으로 치석하여 한단 둘렀다. 자연초석 위에 자연목을 둥글게 다듬어서 기둥으로 사용하였다. 서쪽 협칸과 어칸은 전퇴하여 툇마루를 두고, 전면에 하부 머름을 둔 2짝 세살창을 달았으며, 측면에는 1짝 세살문을 달아 출입을 하도록 하였다. 서쪽 측벽에는 아궁이가 마련되어 있다. 동쪽 협칸은 대청으로, 정면과 측면은 트인 공간을 마련하여 마을 전경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배면에는 판문을 달았다.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대청의 천장을 보면 고식(古式)의 우미량(牛尾梁)형태의 아름답게 휘어진 보를 발견할 수 있다.
  • 전화번호 055-530-1000
  • 관리기관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유어면 미구리 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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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시남 덕벅굴

  • 향토문화유적구분 기념물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18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동굴
  • 지정일자 1986-05-30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규모
  • 조성시대 미상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창녕 시남 덤벅굴은 창녕군 남지읍 시남리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덤벅굴이 위치한 주소지는 창녕군 유어면 진창리 산 94번지에 해당한다. 따라서 시남 덤벅굴이라는 표현은 행정구역 상 맞지 않다. 창녕 시남 덤벅굴은 낙동강의 동쪽 급경사지 상부에 위치해 있는데, 덤벅굴을 찾기 위해서는 합장골을 따라 약 100m 들어가서 낙동강변 쪽으로 낮은 구릉지를 넘어야 한다. 낙동강 동쪽 절벽 지역에는 암반이 일부 노출되어 있는데, 그 암반을 오른쪽으로 두고 약 20m 진행하면 절벽에 두 개의 동굴이 있다. 이 동굴 안의 벽에는 사람의 손자국이 있고, 바닥에도 큰 발자국이 있는데, 옛날 힘센 장수가 이 굴에서 살았던 흔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시남 마을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오른쪽 굴에는 사람의 뼈들이 많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재 굴 내부에서 사람의 손자국과 바닥에 큰 발자국은 관찰되지 않으며, 사람의 뼈도 확인이 어렵다. 바닥의 큰 발자국은 공룡의 발자국을 보고 그렇게 생각하였을 수도 있으나 확인할 길은 없다. 왼쪽 굴은 깊이가 7m이고, 굴의 입구 높이는 약 1.5m, 폭은 약 1m이며, 들어갈수록 급격히 좁아지고 높이도 낮아진다. 오른쪽 굴은 깊이가 6.8m, 입구의 높이는 약 2m, 폭은 약 1m이다. 들어갈수록 굴의 폭이 좁아지고 높이도 낮아지는 것은 좌측굴과 같지만, 좌측굴보다는 넓다. 창녕 시남 덤벅굴이 위치한 곳은 창녕 이방 동산굴과 같이 중생대 백악기 함안층이 분포하는 곳으로 붉은색의 셰일과 고운 모래가 쌓여 형성된 사암이 분포하는데, 퇴적암의 줄무늬인 층리와 사층리가 잘 발달되어 있다. 작은 동굴 속에 박쥐와 곱등이 등의 생물체가 서식하고 있다.
  • 전화번호 055-530-1000
  • 관리기관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유어면 진창리 산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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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이방 동산굴

  • 향토문화유적구분 기념물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20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동굴
  • 지정일자 1986-05-30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규모
  • 조성시대 미상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창녕 이방 동산굴은 창녕군 이방면 동산리 동산마을 고장산(해발 228m) 남쪽 큰골 계곡에 위치한다. 이곳은 현재 사유지인 황금농원 단감나무밭으로 우포늪 단감마을이라고 하는 곳 안에 있다. 마을 주민들은 동산굴이 낙동강과 연결되어 있다고도 하고, 임진왜란 때에는 이 굴 속에서 인근 주민들이 피난을 했다고도 한다. 동굴의 입구는 단감나무 농장을 관리하기 위한 도로변에 위치한다. 동굴 입구의 높이는 약 2.5m, 폭이 약 4m이다. 동굴의 총 길이는 확인된 부분만 약 31m 이상, 최대 폭 약 4.6m, 높이는 2.6m로 측정되었다. 동굴 입구로부터 1/4 지점에서 급격히 좁아졌다가 다시 넓어지는 구조를 보인다. 또한 1/2 지점에서 오르막 지형이 형성되면서 3/4 지점에서는 천장이 급격히 높아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창녕 이방 동산굴이 위치한 곳은 중생대 백악기 함안층이 분포하는 곳으로 붉은색의 셰일과 사암층이 분포한다. 동굴 내부에서는 물결자국과 건열, 무척추동물이 남긴 생물 흔적이 관찰되며, 동굴 천장에는 흰색의 침전물이 피복되어 있는데, 지하수에 의해 영향을 받아 형성된 침전물일 가능성이 있다. 비교적 작은 동굴임에도 불구하고 동굴 내부에는 관박쥐와 곱등이, 거미 등의 생물체가 서식하고 있다.
  • 전화번호 055-530-1000
  • 관리기관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동산리 135-1
  • 네이버맵 네이버맵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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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이버 창녕 이방 동산굴 검색 링크

창녕 현감비군

  • 향토문화유적구분 유형문화유적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28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조각
  • 지정일자 1986-05-30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규모 34기
  • 조성시대 조선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창녕 현감비군은 창녕지방의 지방관인 현감, 군수와 창녕을 관할하는 관찰사의 선정비를 모은 것이다. 관찰사 7기, 현감 23기, 군수 3기, 참봉 1기 등 모두 34기이다. 이외에도 나무아미타불 비석이 하나 더 있으나 선정비를 모을 때 같이 모은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선정비로 지방관의 행적을 기리는 내용이다. 조선시대 지방관 관련 가장 많은 비석이 선정비로 특히 17세기 이후 많이 건립되었다. 선정비는 유애비(遺愛碑)·거사비(去思碑)·청덕비(淸德碑) 라고도 한다. 재질에 따라 석비, 목비, 철비 등이 있었고 비각을 같이 설치하는 경우도 있었다.
  • 전화번호 055-530-1000
  • 관리기관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22
  • 네이버맵 네이버맵 링크
  • 카카오맵 카카오맵 링크
  • 네이버 창녕 현감비군 검색 링크

창녕포교당 신중도

  • 향토문화유적구분 유형문화유적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32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회화
  • 지정일자 1989-07-18
  • 소유주체구분 국유
  • 소유자명 통도사창녕포교당
  • 규모 1폭
  • 조성시대 조선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양산 통도사 창녕포교당 신중도는 근대기 이후 적멸보궁에 봉안된 불화로 불법을 수호하는 신중(神衆)을 그린 그림이다. 화면 크기는 세로 141cm, 가로 160.2cm이고, 면 바탕에 채색하였으며 주조색은 청색, 녹색, 주홍색이다. 신중은 원래 고대 인도에서 신앙되던 토속신인데 부처의 설법을 듣고 감화하여 불교에 귀의한 호법선신이며 토착신이 불교화되는 습합 과정을 보여주는 도상이다. 이 신중도는 제석천과 범천, 위태천을 역삼각형 구도로 크게 배치하고 나머지 권속들을 화면에 빽빽하게 그려 넣었으며 적절히 구름을 사용하여 공간과 인물들을 구획하였다. 화면의 상단에는 범천과 제석천을 중심으로 일월천자(日月天子), 조왕신, 천녀, 동자 등을 그렸고 하단에는 갑옷을 입고 깃털이 장식된 투구를 쓴 위태천과 사천왕, 산신 등을 배치하였다. 이러한 신중도는 조선 후기에 유행하여 크고 작은 전각 안에 거의 빠짐없이 봉안되었는데 범·제석천, 위태천을 중심으로 한 배치 구도와 호법신들의 구성은 근대기 이후에 조성되는 신중도의 특징이다. 즉 창녕포교당 신중도는 구도와 배치, 그리고 탁한 채색과 명암법 등이 두드러진 특징으로 화기 등 그림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근대기 이후 제작된 불화로 추정된다. 이 불화는 전통적 틀을 벗어나 근대적인 요소로 새로운 화풍을 보여주고 있어 근대 불교미술 자료로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 전화번호 055-533-2295
  • 관리기관명 통도사창녕포교당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신당2길 4-3
  • 네이버맵 네이버맵 링크
  • 카카오맵 카카오맵 링크
  • 네이버 창녕포교당 신중도 검색 링크

양산 통도사 창녕포교당 산신도

  • 향토문화유적구분 유형문화유적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33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회화
  • 지정일자 1994-10-05
  • 소유주체구분 국유
  • 소유자명 통도사창녕포교당
  • 규모 1폭
  • 조성시대 조선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양산 통도사 창녕포교당 산신도는 고종 34년(1897) 화왕산 도성암(道成庵)에 봉안하기 위해 화승 태일(太一)이 주축이 되어 산신을 그린 불화로 현재는 포교당 설법전에 걸려 있다. 산신도는 산왕(山王)으로 신앙되던 호랑이를 의인화하여 그린 그림인데 불교에서 산신은 원래 『화엄경』에서 불법을 외호하는 신들 중의 하나인 주산신(主山神)이다. 불교가 민간신앙과 결합하고 절충하는 과정에서 산의 신령으로 믿어온 호랑이와 주산신이 결합하여 산신이 되었다. 이 산신도는 화면 크기가 세로 92.6cm, 가로 83.2cm인 면 바탕에 산신과 호랑이, 소나무, 깊은 산과 골짜기를 배경으로 그렸다. 화면 중심에 크게 그려진 산신은 머리에는 탕건을 쓰고 한 손에 파초 형태의 부채를 든 채 기암괴석 위에 앉아 있고, 그 옆에 꼬리를 길게 뻗친 호랑이가 앞발톱을 세우고 산신을 쳐다보고 있다. 배경에는 소나무, 괴석, 불로초, 구름, 폭포 등이 묘사되어 전형적인 조선 후기 산신도의 특징을 보인다. 창녕포교당 산신도는 화기를 통해 원 봉안처, 제작시기, 제작자 등을 정확히 알 수 있고, 안정적인 구도, 민화풍의 해학적 인 호랑이와 소나무 묘사, 청색 안료로 그려진 산수 등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와 근대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산신도로 자료적 가치를 가진다.
  • 전화번호 055-533-2295
  • 관리기관명 통도사창녕포교당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신당2길 4-3
  • 네이버맵 네이버맵 링크
  • 카카오맵 카카오맵 링크
  • 네이버 양산 통도사 창녕포교당 산신도 검색 링크

양산 통도사 창녕포교당 관음보살, 대세지불상

  • 향토문화유적구분 유형문화유적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31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조각
  • 지정일자 1989-07-18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통도사창녕포교당
  • 규모 1기
  • 조성시대 조선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양산 통도사 창녕포교당 관음보살·대세지보살상은 목조석가여래좌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74호)의 협시보살이다. 본존상과는 서로 다른 특징으로 이후에 후보(後補)된 상들이다. 오른쪽의 관음보살상은 화려한 대세지보살상에 비해 전체적인 모습이 단정하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리고 왼손은 가슴 앞으로 들어 만개한 연꽃가지를 들고 있다.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큰 편이며, 머리에는 화불이 있는 띠형 보관을 쓰고 있다. 귀 양측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은 어깨에서 모아져 여러 개의 구불구불한 가닥으로 나누어 흘러내리는데 전통적인 보살상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다. 큰 얼굴은 이목구비가 큼직하고 반듯하며, 목에 삼도가 양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법의는 통견식으로 입었으며, 가슴 아래의 승각기는 띠로 묶어 나비모양의 매듭으로 모양을 내었다. 왼쪽의 대세지보살상은 결가부좌의 자세에 오른손은 아래로 내리고 왼손은 가슴 앞으로 들어 연꽃봉우리를 들고 있다. 머리를 모아 묶어 올린 보계가 높아 투각된 띠형의 보관 위로 높게 올라와 있다. 어깨에는 천의를 숄처럼 돌려 입고 가슴에서 또 다른 천으로 묶어 내렸으며, 어깨에서 흘러내린 천의는 양 팔 위로 넘겼다. 두 상 모두 자세, 머리, 착의법 등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과는 차이가 있으며, 근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전화번호 055-533-2295
  • 관리기관명 통도사창녕포교당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신당2길 4-3
  • 네이버맵 네이버맵 링크
  • 카카오맵 카카오맵 링크
  • 네이버 양산 통도사 창녕포교당 관음보살, 대세지불상 검색 링크

창녕 옥천사지

  • 향토문화유적구분 기념물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27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절터
  • 지정일자 1986-05-30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김영김씨문중
  • 규모 6344㎡
  • 조성시대 고려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창녕 옥천사지는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산 219번지 일원에 위치한 절터로 관룡산 자락의 남쪽 구릉사면에 위치해 있다. 주변에는 구현산, 화왕산, 관룡산, 영축산이 위치하며 관룡산에서 내려오는 작은 하천을 옆에 끼고 있다. 옥천사가 창건되고 운영된 내용은 문헌 자료에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고려 후기 승려 신돈의 어머니가 옥천사 노비였으며, 신돈도 창녕의 영산면 사람으로 이름은 편조(遍照)라 하며, 이곳에서 태어나 성장한 기록이 보인다. 이 일대에서는 석탑재와 석등, 주두(柱頭)가 도드라진 초석받침 등 통일신라 후기의 특징을 보이는 유물들이 확인되어 창건 시기를 이 시기까지 올려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또한 고려시대의 청자편과 기와 등이 확인되었는데, 신돈의 죽음 이전까지 운영되었다가 그의 죽음 이후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돈은 조선왕조가 성립될 당시 매우 부정적인 인물로 인지되었으며, 지금도 이곳 구전에는 이름난 대승이 아니고서는 엉큼한 사람이 중이 된다.” 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옥천사는 고려 말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며, 최근 조사에서 건물지와 만력(萬曆) 연간의 기와 등이 확인되어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까지 건물이 존속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 건물지의 주초(柱礎) 구조가 옥천 서낭당과 같아 당집과 같은 건물이 세워졌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후도 개인 묘역이 형성되어 19세기 이전에는 사지(寺址)의 성격은 거의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 전화번호 000-0000-0000
  • 관리기관명 김영김씨문중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산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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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화왕산 배바위

  • 향토문화유적구분 기념물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29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자연물
  • 지정일자 1986-05-30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규모 1기
  • 조성시대 미상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창녕 화왕산 배바위는 화왕산 정상부(해발 756.6m)에서 남쪽 방향의 절벽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 커다란 바위이다. 배바위라는 명칭은 커다란 바위덩어리가 두 조각으로 나뉘어진 틈새를 지나가려면 사람이 배를 붙이고 지나가야만 겨우 통과할 수 있다고 해서 배바위라고 하며, 또는 천지 개벽시 배舟를 묶어 놓았던 흔적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화왕산을 이루고 있는 암석은 중생대 백악기에 지하에 있던 마그마가 식어서 형성된 흑운모화강암이다. 이 흑운모화강암이 지표에 노출되면서 주변의 퇴적암보다 풍화 침식에 상대적으로 잘 견디는 특성 때문에 주변보다 높은 산과 정상부를 이루고 있다. 화왕산의 정상부는 오목하고 비교적 평편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곳에 억새들이 빽빽하게 자라나 가을이면 장관을 이룬다. 그래서 이곳을 억새평원이라고 부르는데, 지형학에서는 이런 지형을 높은 지대에 있는 평탄한 지표면이라는 의미로 고위평탄면이라고 한다. 고위평탄면은 원래 오랜 세월동안 침식을 받아 지형의 높낮이가 작아진 평탄한 지형이 약 2300만 년부터 258만 년 전 사이에 융기하여 높아지고 주변이 깎여져 나가서 높은 지역에 평탄한 지표면이 일부 남아 있는 모습을 띤 것이다. 이때 흑운모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암석들이 풍화되어 모서리 부분이 둥글둥글해지는 모양으로 변한다. 이런 형태의 암석들이 모여 있는 것을 토르(tor)라고 한다. 화왕산 배바위는 전형적인 토르에 해당한다.
  • 전화번호 055-530-1000
  • 관리기관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산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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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준 홍패

  • 향토문화유적구분 유형문화유적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44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전적
  • 지정일자 2009-03-06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규모 1개
  • 조성시대 조선(1835년) 추정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박관준 홍패는 고종 26년(1889) 12월에 향기사(鄕騎士) 박관준(朴寬俊)에게 발급한 무과 급제 증서이다. 박관준이 병과丙科 2천 1백 몇 등(문서 훼손으로 정확한 등수는 알 수 없다)에 합격한 것을 증명해 주는 문서이다. 조선시대에는 문서에 사용하는 용어를 철저히 구분하였는데, 소과(小科) 급제는 ‘입격(入格)’이라고 하고 대과(大科) 급제는 ‘급제출신(及第出身)’이라고 하였다. 보통 뒷면 표지에는 황색 종이 위에 본문의 내용 중 ‘향기사박관준무과병과이천일백▨인(鄕騎士朴寬俊武科丙科二千一百▨人)’을 한 줄로 써서 급제자의 당시 신분, 이름 및 성적을 표시하였다. 향기사는 조선시대에 지방에서 뽑혀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 등에 근무하던 기사(騎士)를 말한다.무과는 조선시대 무관을 등용하기 위해 실시한 과거이다. 조선시대 무과에는 문과와 마찬가지로 3년에 한 번씩 정규적으로 실시되는 식년무과(式年武科)와 그 밖에 임시로 특설되는 증광시(增廣試), 별시(別試), 알성시(謁聖試), 정시(庭試), 춘당대시(春塘臺試) 등 각종 별시무과가 있었다. 식년무과에서는 초시, 복시, 전시가 있었으며, 최종적으로 갑과 3인, 을과 5인, 병과 20인 등 모두 28인을 선발하였다. 각종 별시는 증광시 외에는 대개 초시가 생략되었고, 선발 인원도 일정하지 않았다. 조선 후기로 내려올수록 식년시 역시 선발 인원이 일정하지 않았다. 홍패는 문무과[대과(大科)] 합격자에게 내리는 합격증서로 붉은 종이에 쓰기 때문에 소과 급제자에게 발급하는 백패(白牌)와 구분하여 홍패라고 한다. 그리고 『대전통편(大典通編)』 「예전(禮典)」 새보(璽寶)조에 의하면 시권(試券)과 홍패, 백패에는 ‘과거지보(科擧之寶)’를 사용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위의 문서 역시 판독하기는 어렵지만 연호의 두 번째 글자 위에 과거지보를 찍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과거제도에 따른 고문서의 형식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 전화번호 055-530-1000
  • 관리기관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창밀로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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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여래입상

  • 향토문화유적구분 유형문화유적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45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조각
  • 지정일자 2009-03-06
  • 소유주체구분 국유
  • 소유자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규모 1기
  • 조성시대 통일신라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청동여래입상은 현재 창녕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전체 높이 5.5cm의 소형금동불이다. 대좌와 불신은 함께 주조되었고, 광배는 결실된 상태이다. 정수리 전체를 차지할 정도로 육계는 넓고 높으며, 머리카락은 소발이다. 고개를 앞으로 약간 내밀어 숙인 상태의 얼굴은 신체에 비해 크다. 방형의 얼굴에 눈과 코, 입은 마멸되어 정확한 얼굴 형태는 알 수 없지만 큰 코에 콧대가 길게 내려와 있다. 어깨는 좁고, 불신의 양감은 약하며, 목에는 삼도가 보이지 않는다. 착의형식은 양 어깨를 대의로 감싼 통견이다. 양 어깨를 비롯하여 무릎 위까지 불신 전체에 U자형의 옷주름이 있다. 무릎 아래에 군의는 발뒤꿈치까지 덮어질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다. 수인은 오른손을 올리고, 왼손을 내린 시무외·여원인으로 짐작되나 양손은 결실이 되어 손가락의 모습은 알 수 없다. 연화대좌는 기단과 상·하대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은 원형이며, 기단 위의 하대는 단판의 복련형을 이룬다. 이에 비해 상대는 앙련이 아닌 연밥형으로 대좌의 형태는 단순한 편이다. 불상의 뒷면에는 다리부분에 광배를 꽂기 위한 꽂이가 보인다. 광배꽂이는 일반적으로 머리나 등에 볼 수 있는데 이 불상은 다리에 있어 뒷면에 세워 고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넓고 큰 육계에 넓은 얼굴, 연화대좌와 소형의 금동불 형식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전화번호 055-530-1000
  • 관리기관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창밀로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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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노비안

  • 향토문화유적구분 유형문화유적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40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고문서
  • 지정일자 2007-01-31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규모 1식
  • 조성시대 조선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사령관노비안은 관아에 소속된 사령(使令)과 관노비(官奴婢)의 실제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작성한 명단으로 고종 23년(1886) 3월에 작성되었다. 구성은 신분과 역할을 쓰고 그 아래에 칸을 낮추어 이름과 변동 상황 순서로 기록하고 있는데 사망이나 도망에 관계없이 다 수록하였으며, 총 64명의 사령과 군뢰(軍牢), 관노(官奴), 수기(首妓), 수급비(水汲婢)의 명단 아래에 변동 상황을 기재하였다. 명단을 보면 사령이 김판돌(金判突) 등 23명, 군뢰가 유성화(兪成化) 등 6명, 관노가 달언(達彦) 등 17명, 수기가 부련(芙蓮) 등 7명, 수급비가 산월(山月) 등 11명이다. 변동 상황이 있는 경우 이름을 검은색 줄로 표시하였고, 이름 아래에 작은 글씨로 사유를 써놓았다. 노비안 작성 당시 이미 사망한 노비 2명, 도망간 노비 3명, 탈안된 자 5명이 확인되어 실제 관아에는 총 64명 가운데 10명이 빠진 54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탈안이란 어떤 문제나 특권을 부여하여 관안(官案)에서 빼주는 것을 말한다. 25개의 붉은 관인이 찍혀 있으며, 겸관(兼官)이 서명하였다. 겸관이란 해당 지역의 수령이 부재중일 경우 이웃 지역의 수령이 겸직하는 경우를 말한다. 조선 후기 관노비는 도망과 신분질서의 붕괴로 그 경제적 가치가 상실되는 추세였다. 그래서 관아에서는 노비의 명확한 신분 파악과 재산관리의 편의를 위해서 이러한 명단을 작성한 것이다. 본 자료는 일부자료로서 한계는 있지만 조선시대 관아의 경제적 기반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사령과 관노비 등에 관한 사항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어 관아의 주요 재원이었던 전답과 더불어 노비를 어떻게 관리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 전화번호 055-530-1000
  • 관리기관명 경상남도 창녕군청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창밀로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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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관룡사 칠성각

  • 향토문화유적구분 유형문화유적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30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건조물
  • 지정일자 1987-11-26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관룡사
  • 규모 1동
  • 조성시대 조선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창녕 관룡사 칠성각은 수명장수를 관장하는 칠성을 봉안한 건물로 내부에는 칠성탱이 있으며 대웅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칠성각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칠성각에 걸려 있던 「명부전 칠성각 상량문」 현판을 통해 1929년에 칠성각 단청이 이뤄졌음이 확인된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소실되었다가 최근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건물은 불규칙한 돌을 사용하여 쌓은 낮은 기단 위에 방형의 초석을 두고 그 위에 둥근 기둥형태인 원주를 세웠다. 정면에는 띠살문이, 나머지 삼면은 벽으로 마감하였다. 도리를 세 줄로 건 3량식 가구로 앞뒤 기둥에 대들보를 걸고 대들보 중앙에 대공을, 대공 위에 각각 도리를 걸어 서까래를 받치도록 하였다. 공포는 익공양식으로 앙서형과 수서형으로 장식하였다. 건물 내부에는 기둥과 기둥사이 긴 틀인 장귀틀(長耳機)과 장귀틀 사이 짧은 장선인 동귀틀(童耳機)을 짜 넣고 그 사이 마루청판(抹樓廳板)을 끼워 넣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천장 역시 반자틀을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짠 후 넓은 널로 덮어 꾸민 우물천장을 하였다.
  • 전화번호 055-521-1747
  • 관리기관명 관룡사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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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관룡사 명부전

  • 향토문화유적구분 유형문화유적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41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건조물
  • 지정일자 2007-01-31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관룡사
  • 규모 1동
  • 조성시대 조선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창녕 관룡사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시왕을 모신 전각으로 대웅전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장보살은 천상에서 지옥에 이르는 중생을 교화시켜 성불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 명부전은 조상의 천도를 위한 도량이다. 명부전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순조 34년(1834)에 쓰여진 「대고중창기(大鼓重創記) 명부전 칠성각 상량문」에 명부전이 나오고 있어 조선시대에는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976년에 지장보살상 개금과 함께 중수하였으며 현재의 명부전은 2000년에 보수되었다. 명부전의 기단은 화강암을 장방형으로 다듬어 쌓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도리를 세 줄로 건 3량식 가구로 앞 뒤 기둥에 대들보를 걸고 대들보 중앙에 대공을, 대공 위에 각각 도리를 걸어 서까래를 받치도록 하였다. 건물 내부에는 기둥과 기둥 사이 긴 틀인 장귀틀(長耳機)과 장귀틀 사이 짧은 장선인 동귀틀(童耳機)을 짜 넣고 그 사이 마루청판(抹樓廳板)을 끼워 넣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천장 역시 반자틀을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짠 후 넓은 널로 덮어 꾸민 우물천장을 하였다. 명부전 내부 불단 위에는 주존인 목조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상의 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그 좌우에는 저승의 삼판관인 시왕상十王像과 판관상, 귀왕상, 인왕상 2점 등 총 17점이 배치되어 있다. 제8대왕인 평등대왕에서 나온 복장발원문에 의해 불상 제작에 효종 3년(1652) 응혜(應惠), 계찬(戒贊), 밀운(密云), 인계(印戒), 축한(閑), 해기(海機), 사민(思敏) 등 9명의 조각승이 참여하였음이 밝혀졌다.
  • 전화번호 055-521-1747
  • 관리기관명 관룡사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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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이버 창녕 관룡사 명부전 검색 링크

창녕 관룡사 법고

  • 향토문화유적구분 유형문화유적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42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공예품
  • 지정일자 2008-03-19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관룡사
  • 규모 1개
  • 조성시대 조선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창녕 관룡사 법고는 관룡사 범종루에 위치한 북이다. 법고는 사찰에서 불교의식을 행할 때 사용하는 큰 북으로 범종, 운판(雲版), 목어(木魚)와 함께 사찰 법구 사물(四物) 중 하나이다. 법고에서 울리는 소리는 말 그대로 부처의 법으로 들짐승같은 축생(畜生)을 구제해 준다는 의미가 있다. 창녕 관룡사 법고는 법고를 받치는 법고대(法鼓臺)와 세트로 이루어져 있으며 채색하지 않고 나뭇결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법고는 크기가 길이 142cm, 너비 100.3cm이고, 여러 개의 나무를 이어 몸통을 만들었으며 양쪽 북면은 소가죽으로 막아 제작하였다. 특히 나무판의 각 부분은 서로 맞대어 이은 다음 가운데를 나비장으로 연결하였으며 나비장 주위로 여러 개의 쇠못을 일렬로 박아 단단히 고정시켰다. 법고대는 높이 119cm, 너비 148.7cm이고, 사자 혹은 해치 형태의 몸통 위로 기둥인간주(間柱)를 두고 그 위에 연잎을 올려 법고를 받치는 형태이다. 사자(혹은 해치)는 웅크리고 앉아 있는데 부릅뜬 눈, 주름진 콧잔등의 코, 날카로운 이빨 등을 표현하여 용맹한 모습이며 날카로운 발톱과 잔뜩 힘을 준 듯한 앞발의 표현이 세밀하다. 이러한 사자나 해치형의 법고대는 전생의 죄업을 비춰주는 거울인 업경대(業鏡臺)와도 매우 유사하다. 조선 후기 17~18세기가 되어 사자와 해치형 받침대가 업경이나 법고와 같은 불교 공예품의 좌대로 혼용되었음을 보여준다. 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창녕 관룡사 법고는 법고대와 함께 세트로 현존하는 드문 사례로 채색하지 않고 나뭇결의 느낌을 그대로 살린 소박함이 아름답다. 또한 제작기법을 고스란히 드러낸 법고의 형태와 용맹한 모습의 동물형 법고대가 잘 조화되어 당시의 불교문화를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 전화번호 055-521-1747
  • 관리기관명 관룡사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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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카오맵 카카오맵 링크
  • 네이버 창녕 관룡사 법고 검색 링크

창녕 관룡사 불화

  • 향토문화유적구분 유형문화유적
  • 문화유적지정번호 창녕군 향토유적 제43호
  • 향토문화유적종류 회화
  • 지정일자 2009-03-06
  • 소유주체구분 사유
  • 소유자명 관룡사
  • 규모 1폭
  • 조성시대 조선
  • 이미지정보
  • 향토문화유적소개 창녕 관룡사에는 대웅전 후불벽에 그려진 관음보살 벽화(보물 제1816호) 외에 대웅전에 걸려 있는 아미타회상도(1940)와 지장시왕도, 칠성각의 칠성도(1895) 등이 있다. 아미타회상도는 세로 182.2cm, 가로 224cm 가량의 비단 바탕에 아미타불이 서방극락세계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불화이다. 아미타를 중심으로 관음·대세지보살을 비롯한 보살들, 범·제석천 및 사천왕의 호법신중, 그리고 가섭과 아난 등을 군집형 구도로 그렸다. 딱딱한 인물 표현, 탁한 설채법, 사발 형태의 그릇을 든 관음보살의 새로운 모습 등 근대적 요소가 특징으로 1940년에 제작되었다. 지장시왕도는 지장과 시왕(十王)을 묘사한 그림으로 중앙에 큼직하게 그려진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무독귀왕, 도명존자가 서 있고, 그 주위를 시왕, 판관, 사자, 동자, 옥졸 등이 에워싸듯 배치하였다. 그림의 구도와 주조색으로 사용된 적색, 녹색, 청색의 탁한 색채감에서 18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칠성각에 봉안된 칠성도는 북극성(北極星)을 여래화한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일광과 월광보살, 칠여래, 도인 형상의 칠원성군(七元星君), 자미대제(紫微大帝), 삼태육성(三台六星) 등을 배치하였고 구름으로 적절히 인물들을 구획하였다. 이 칠성도는 화기를 통해 고종 32년(1895, 개국 504)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를 세는 기법으로 조선시대 불화는 대체로 중국연호를 사용하는데 반해 관룡사 칠성도는 조선의 개국연도에 따라 표기하여 조선 말기의 자주의식을 고취시킨 시대양상을 반영하고 있어 역사적 자료로도 가치를 지닌다.
  • 전화번호 055-521-1747
  • 관리기관명 관룡사
  • 데이터기준일자 2023-07-31
  •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 네이버맵 네이버맵 링크
  • 카카오맵 카카오맵 링크
  • 네이버 창녕 관룡사 불화 검색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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