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유적소개 어유소(1434∼1489년) 장군은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 자는 자유(子遊), 본관은 충주이다. 1434년(세종 16년)에 양주(현 지행동)에서 병마수군절제사 어득해의 아들로 태어났다. 1451년(문종 1년)에 내금위에 선보되고 1456년(세조 6년) 여진 정벌에 큰 공을 세워 회령부사를 지냈다. 1467년(세조 13년) 5월에 함길도에서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좌대장으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이 되어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지고 공조판서에 특진되었다. 그 해 겨울 명나라 건주위(建州衛)를 칠 때 좌대장으로 큰 공을 세웠고, 1469년(예종 1년) 함경북도 절도사, 1471년(성종 2년) 좌리공신(左理功臣) 4등이 되고 두 차례나 영안북도(永安北道) 절도사를 지냈다. 시호는 정장(貞壯)이다. 묘 앞에는 묘비·상석·무인석이 갖추어져 있고 고령 신씨(高靈申氏)의 묘가 합장되어 있다. 신도비는 화강암의 방형 기단 위에 세워져 있는데 월두형의 비신에 투구형의 옥개(屋蓋)가 조각된 것이 특징적이다. 성종군 어세겸이 찬하고, 안심서의 전액으로 되어 있는 비문은 거의 마모되어 확인되지 않으며 정장공신도비명(貞에壯公神道碑銘)이란 전액이 확인될 뿐이다. 묘역은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는 미군부대 내에 위치하고 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본명은 홍병준으로 구한말의 애국지사로 자는 덕문(德文),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복영(福永)의 아들로 1864년(고종 1년) 10월 1일 걸산동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919년 음력 2월 25일 동두천 장날 정오에 1천여명의 군중을 인솔하고, 선두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지휘하다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갖은 고문과 악형을 당하였다. 그러나 감옥에서도 만세를 연창하며 백절불굴의 의지를 보였으나 형기를 마치고 돌아온 후 결국 고문과 형독(刑毒)으로 1923년 5월 17일 걸산동 자택에서 타계하였다. 이후 선생의 빛난 얼을 되새겨 의열(義烈)의 감(感)을 후세에 지표로 삼기 위하여 1975년 동두천노인회 주관으로 독립유공자추모회(위원장 김석경)를 결성하여 시민의 성금을 모아 추모비를 세웠다. 또한 1991년 6월 1일 선생의 고귀한 순국 이념과 숭고한 애국 정신을 기리는 뜻으로 김석경이 기탁한 성금으로 동두천 애향동지회 주관으로 비각(碑閣)이 건립되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삼충단은 1453년(단종 1년)부터 1456년(세조 2년)까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항거하며 단종의 복위에 가담했던 민신(閔伸),조극관(趙克寬),김문기(金文起) 등 세 충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32년 9월 김문기의 후손 김항권이 양주 유림의 협조를 얻어 호패비(號牌碑)를 세우고 해마다 춘추로 종정일을 택해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민신 선생의 호는 둔암(遯菴),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문종 때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단종 원년 계유정난 때 현능(顯陵) 비역(碑役)을 감독하던 중 김종서의 일파라 하여 비역소(碑役所)에서 참살 당했다. 정조 때 복관되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김문기 선생의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百村), 본관은 금령(金寧)이다. 1426년(세종 8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검열(檢閱),정언(正言),함길도관찰사를 거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1456년(세조 2년)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했다가 처형되었는데 영조 때에 가서 복관(復官)되었고,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조극관 선생의 본관은 양주이다.1414년(태종 14년) 문과에 급제한 뒤 1441년(세종 23년) 우승지,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451년(문종 1년) 동지중추부사, 대사헌, 우참찬을 지냈다. 단종 원년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1453년 계유정란 때 김종서의 일파로 몰려 격살(擊殺)되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정사호(鄭賜湖, 1553∼1616년)는 조선 중기 때의 문신으로 자는 몽여(蒙與), 호는 화곡(禾谷), 본관은 광주로 장령(掌令)을 지낸 이주(以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573년(선조 6년) 사마시에 급제한 후 1577년(선조 10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주서(注書), 호조좌랑, 안동부사, 호조참의 등을 지냈고 금성현령으로 있을 때에는 임진왜란을 맞아 왕자일행의 북행길을 호위하고 현민소개에 힘썼다. 또한 정유재란 때 안동부사로 명나라 군대와 함께 왜적을 토벌하여 큰공을 세워 1601년(선조 34년) 이래로 다섯 번이나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1602년(선조 35년) 대사헌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듬해 황해도 관찰사가 되고, 뒤이어 경상도·평안도·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1609년 선조가 죽자 이조참판으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여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이어 한성판윤을 거쳐 1615년(광해군 7년) 형조판서에 올랐고, 얼마 뒤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16년(광해군 8년) 향년 64세로 죽었다.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민(忠敏)이다.
향토문화유적소개 원래의 묘비는 백대리석으로 높이 133㎝, 폭 61㎝, 두께 20㎝의 규모이다. 한국전쟁의 탄흔으로 판독이 어려워 1985년 5월 새로이 옥개를 얹은 비를 세웠으며, 재질은 흑대리석이고 규모는 높이 150㎝, 폭 55㎝, 두께 24㎝이다.목행선(1609∼1661)은 조선 중기 때의 문신으로 자는 행지. 호는 남간(南磵)이며 본관은 사천이다. 인조 8년(1630)에 진사가 되고 1633년(인조 11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 갑과로 장원하여 성균관 전적(典籍)과 예조·병조의 좌랑을 거쳐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는 경기도사로 있으면서 곤궁에 빠진 백성들의 진휼에 힘썼다. 그 후 지평(持平), 수찬(修撰),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 승지(丞旨) 등의 직책을 역임하였으며, 1653년(효종 4년)에는 황해도 관찰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탑동 동점마을 입구 우측 하천 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 선조 때 포천 현감을 지낸 토정 이지함(李之函) 선생이 새겼다고 전해지는 방위표시가 자연석에 각자 되어 있다. 바위 크기는 3×2m이며, 상하 3줄이다. 좌로부터 (一二三四_첫줄), 六七八九_둘째줄), 黃中元吉_셋째줄)이 각자 되어 있다. 오행(五行)에서 一과 六은 물·북쪽, 二와 七은 불·남쪽을, 三과 八은 나무·동쪽을, 四와 九는 쇠(金)·서쪽을 각각 의미하며, 황(黃)은 五와 十의 상징으로 흙과 중심을 뜻한다. 오행설에서 유래하는 이 암각화는 동점마을이 우리 나라의 중심지이면서 가장 좋은 길지로서 잡귀를 물리치고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로 세워진 것이다.
향토문화유적소개 고려시대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좌상(石佛坐像)으로, 일설에는 이곳이 조선초 폐사된 대찰 회암사의 아홉 암자 중 한 암자가 있던 곳이라고 전하고 있다. 마을 지명이 탑동으로 유래된 것도 바로 이곳에 탑과 석불이 상당수 자리잡고 있었던데 기인한다고 한다. 화강의 석불좌상은 연화문이 선명하게 조각된 대좌(臺座) 위에 항마좌(降魔坐)를 하고 있는데, 육계(肉鷄)의 오도부분은 떨어져 나가고 나발(螺髮)에서 수인에 이르기까지 심한 마모현상을 나타내고 있으나 얼굴 부분은 온화한 형상을 하고 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세조∼성종대의 탁월한 무인 어유소(1434∼1489년) 장군의 제사를 모시는 곳이다. 본래의 사당은 광암동(좌기골) 묘소 아래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의 수탈이 심해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사당이 불타 없어져 근래에 들어 목조건물을 신축하였다.
향토문화유적소개 자재암에는 보물 제1211호로 지정된(1994년 10월 17일)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般若波羅密多心經若疏)』 언해본이 보관되어 있다. 이 판본은 현재 보물 제771호로 지정된 서울대학교 도서관본과 동일한 책이나 서울대학교본에 없는 전이 붙어있고, 교정인이 찍혀 있으며 보존상태 또한 훨씬 양호하다. 저지(楮紙) 목판본이며 목판본불상의 복장에서 나온 것인 듯 표지가 없다.자재암은 645년(신라 선덕여왕 14년)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로서 974년)고려 광종 25년) 왕명으로 각규대사(覺圭大師)가 중창했으며, 1153년(의종 7년) 화재를 당해 이듬해 각령선사(覺玲禪師)가 대웅전과 요사 일부를 증건했다. 1872년(조선 고종 9년) 원공선사와 제암화상이 퇴락된 이 사찰을 44칸의 건물로 복원하고 영원사(靈源寺)라 개칭했다. 1907년(순종 원년) 정미의병 때는 이곳이 의병 활동의 근거지였던 탓으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불태워졌다. 이후 제암화상과 그의 제자 성파(性波) 스님이 복원하여 원래 이름인 자재암으로 고쳤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또다시 폐허가 되어 1961년 대웅전, 1971년에 요사, 1974년에 포교당과 원효대, 1977년에는 삼성각을 각각 건립하였다.
향토문화유적소개 사패지는 국가나 왕실에 공을 세운 신하에게 왕이 임의로 특별히 하사하는 토지를 말하는데 사전(賜田) 또는 별사전(別賜田)이라고도 한다.이 사패지 경계석(賜牌地 境界石)은 조선 초기의 무신인 어유소(魚有沼, 1434∼1489년) 장군이 1488년 국왕인 성종(成宗)과 함께 어등산에 올라 사냥을 하던 중 날아가는 솔개를 쏘아 맞혀 떨어뜨리자, 어유소 장군의 뛰어난 궁술에 감탄한 성종이 어장군에게 현재의 동두천시 일대를 사패지(賜牌地)로 하사하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문인석(文人石)을 세운 것이라고 전해온다. 이 문인석(文人石)은 맞은편 생연초등학교 후문 우측에 있던 또다른 문인석과 대좌향을 이루고 있다가 동두천시청 청사 이전 얼마 후 시청 내 전디공원으로 옮겨논 후(정확한 이유와 시기는 알 길이 없다.) 자유수호평화박물관으로 이전하였으며 나머지 하나도 토지소유주의 이전 요구에 따라 2007년 5월 3일 자유수호평화박물관으로 이전하여 현재 두개가 나란히 세워져있다. 일반 문인석보다 그 규모가 작으며, 머리 부분은 한국전쟁 때 그 일부가 파손되는 등 탄흔이 역력한 이 문인석을 통해 동두천시의 과거사를 부분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