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유적소개 조선중기 문신이자 문장가인 유몽인과 아들 유약의 묘역이다. 유몽인의 본관은 고흥으로, 자는 응문應文, 호는 어우당於于堂·간재艮齋·묵호자默好子이다. 1589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1592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 광해군을 따랐으며 이후 한성부좌윤·대사간 등을 지냈다. 1617년 인목대비의 폐모론을 반대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623년 인조반정이 발생하자 광해군의 복위를 꾸민다는 무고誣告로 아들과 함께 사형되었다. 1794년 정조正祖 대에 이를러 신분이 복원되면서 의정義貞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이조판서에 추대되었다. 저서로 어우야담於于野談과 어우집於于集을 남겼는데 특히 어우야담은 조선 후기에 유행한 설화집의 효시로, 문장이 과감하고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되는 문학집이다. 유몽인 묘는 봉분 앞에 부인인 고령신씨의 묘가 조성 된 1619년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상석과 좌우로 문인석이 각각 1기씩 서 있고 우측에 2008년에 세운 비석이 있다. 유약의 묘는 2008년 새로이 조성하였다.
향토문화유적소개 1927년 안석연이 자료를 수집·편집하여 완성한『봉선사본말사지』에 따르면 신라 법흥왕 때 인도승 마라가미가 중국을 거쳐 신라로 왔는데, 법흥왕이 그를 맞이하여 큰 가람을 세우고 그 산을 운악이라 하였다 하여 이때 사찰이 처음 세워진 것으로 전함. 이후 고려 후기 보조국사 지눌이 절을 짓고 현등사라 편액 하였고 그 후 1411년(태종 11) 함허대사가 중창함. 1823년(순조 23)에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해에 다시 중건하였고 1916년에 다시 중수함.